고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쟁이 정치권으로 번진 가운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건 직후 딸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보낸 친필편지가 국회에서 공개됐다. 국민의힘 유영하 의원은 10월 2일 기자회견을 열어 편지 사본을 공개하고 영화 상영 중단과 제작진의 사과를 요구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영화 관련 행사 취소와 배우를 향한 비판이 이어지는 상황을 두고 문화예술계에 대한 과도한 압박이라고 맞섰다. 영화의 역사적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유족의 문제 제기, 정치권 공방, 행사 취소 문제로까지 확산되는 모습이다.
1974년 8월 17일 작성된 편지, 52년 만에 공개
유영하 의원이 공개한 편지는 1974년 8월 17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시 프랑스에서 귀국 중이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보낸 글이다. 육영수 여사는 같은 달 15일 광복절 기념식 도중 총격을 받고 숨졌고, 편지는 그로부터 이틀 뒤 작성됐다. 연합뉴스의 10월 2일 국회 기자회견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 편지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은 채 보관해왔다.
편지에는 아내를 잃은 박 전 대통령의 비통한 심경과 귀국하는 딸을 걱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공개된 내용에서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이 맞을 총탄을 육 여사가 대신 맞았다는 취지로 적었고, 자신이 대신 맞고 육 여사가 살아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심정을 밝혔다. 가족과 국가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며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어려움을 함께 견뎌내자는 취지의 당부도 남겼다.
유 의원은 편지를 공개한 이유에 대해 영화가 제시한 역사적 해석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영화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의 관계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감독과 제작진에 공개 사과와 상영 중단을 요구했다. 법적으로 가능한 대응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입장도 밝혔다. 다만 이는 유 의원과 박근혜 전 대통령 측이 제기한 주장으로, 영화의 역사적 표현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나 확정된 법적 결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암살자(들)’은 실제 사건을 어떻게 다뤘나
‘암살자(들)’은 허진호 감독이 연출하고 유해진, 박해일, 이민호 등이 출연한 작품으로,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미스터리 추적극이다. 연합뉴스가 지난 9월 10일 보도한 허진호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작품은 실제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보다는 형사와 언론인 등 가상의 인물들이 사건의 의혹과 배후를 추적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허 감독은 작품을 준비하면서 다큐멘터리와 책, 논문, 해외 자료 등을 찾아보며 이야기를 발전시켰다고 설명했다. 실제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하면서도 등장인물과 추적 과정에는 극영화의 구성이 포함됐다. 영화의 중심에는 형사 철구와 신문사 사회부장 재환, 신입 기자 영일 등이 있으며, 이들은 사건을 둘러싼 의문을 좇는 가상의 인물로 설정됐다.
논쟁은 영화가 실제 역사적 사건에서 출발하면서도 극적 상상력을 이용해 사건의 의혹과 배후를 추적하는 구조를 취했다는 점에서 커졌다. 국민의힘과 박근혜 전 대통령 측은 영화의 일부 설정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건의 배후와 관련됐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 허진호 감독은 개봉 전 인터뷰에서 당시 시대와 사건을 통해 사실과 진실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는 취지로 작품을 설명했다.
따라서 현재의 논쟁은 영화 속 표현을 역사적 사실로 볼 수 있는지의 문제와 함께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하는 극영화에서 창작의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지의 문제를 동시에 포함한다. 정치권의 주장과 영화 제작진의 작품 설명이 서로 다른 지점을 강조하고 있어 양측의 입장을 구분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산 시사회와 부산국제영화제 일정도 잇따라 취소
논란은 영화 홍보와 상영 관련 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부산영상위원회는 10월 5일 CGV 센텀시티에서 시민 80명을 대상으로 열 예정이던 대시민 시사회를 취소했다. 아주경제의 10월 2일 보도에 따르면 부산영상위원회는 작품을 둘러싼 최근 상황과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취소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도 10월 2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참석과 10월 7일 예정됐던 야외무대인사 일정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가 전한 제작사 발표에 따르면 제작사는 영화를 둘러싼 최근 상황을 검토한 뒤 관객과 참석자들의 안전과 원활한 행사 진행을 고려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개봉 2주 차인 10월 3일부터 5일까지 진행하려던 극장 무대인사 일정도 취소됐다. 배우 이민호가 참여할 예정이던 부산국제영화제 토크 프로그램 ‘액터스 하우스’ 역시 열리지 않게 됐다. 작품을 둘러싼 정치권 논쟁이 실제 오프라인 홍보 일정 변경으로 이어지면서 사안은 영화 내용에 대한 평가를 넘어 행사 운영과 출연진을 둘러싼 문제까지 확대됐다.
행사 취소를 두고도 해석은 갈리고 있다. 제작사와 행사 주최 측은 안전과 원활한 행사 운영 등을 이유로 들었으며,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상황 자체를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이 제기됐다. 따라서 행사 취소의 모든 원인을 특정 정치세력의 행동으로 단정하거나 반대로 영화 자체의 문제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현재 확인된 발표 범위를 넘어선다.
국민의힘은 역사 해석 문제 제기, 민주당은 압박 우려
국민의힘에서는 유영하 의원뿐 아니라 당 지도부와 일부 의원들이 영화의 역사적 설정에 문제를 제기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공개된 편지 내용을 언급하면서 영화에서 제기된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의혹을 비판하고 상영 중단과 사과를 요구했다. 국민의힘 측 주장의 핵심은 실제 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는 작품이 사실과 다른 인상을 줄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다른 측면을 강조했다. 이데일리가 10월 2일 보도한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발언에 따르면 최민희 최고위원은 부산국제영화제 관련 행사가 취소된 상황을 거론하면서 영화와 제작진을 향한 정치권의 공세를 비판했다. 민주당에서는 작품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논란이 배우와 문화행사에 대한 압박으로 확대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나왔다.
배우 유해진의 외모를 둘러싼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의 발언 역시 별도 쟁점이 됐다. 민주당 전용기 최고위원은 해당 발언을 배우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이라고 비판했다. 이 문제까지 더해지면서 당초 영화의 역사적 해석에서 시작한 논쟁이 배우 개인에 대한 정치권 발언과 문화행사 취소 문제로 범위를 넓히게 됐다.
현재 논란에는 서로 다른 쟁점이 겹쳐 있다. 국민의힘과 박근혜 전 대통령 측은 실제 역사적 사건과 유족이 존재하는 만큼 창작에도 그에 따른 책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민주당은 작품에 대한 의견 표명과 정치권의 압박, 배우 개인을 향한 공격은 구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어느 한쪽의 정치적 평가를 사실로 단정하기보다 영화의 실제 내용과 제작진의 설명, 유족 측의 주장, 행사 취소 과정 등을 나눠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이번에 공개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편지는 1974년 사건 직후 가족에게 남긴 개인 기록이라는 점에서 새롭게 공개된 자료다. 그러나 편지 하나가 영화의 모든 서사적 요소에 대한 역사적 판단을 확정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속 설정을 곧바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쟁은 실제 기록과 영화적 상상력의 경계, 유족의 문제 제기와 제작진의 표현, 정치권이 문화예술 작품에 대응하는 방식이라는 여러 쟁점이 동시에 맞물린 사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