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서버 시장 확대가 반도체뿐 아니라 고성능 반도체 패키지기판 투자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삼성전기가 국내 세종사업장과 베트남 생산법인에 총 6조7800억원을 투입해 패키지기판 생산능력을 대폭 확대한다. 특히 세종에는 단일 제품 기준 회사 역대 최대 규모인 4조2700억원이 투입된다.
이번 투자의 중심에는 AI 가속기와 그래픽처리장치(GPU), 중앙처리장치(CPU) 등 고성능 반도체에 사용되는 플립칩 볼그리드 어레이(FC-BGA)가 있다. AI 서버와 고성능컴퓨팅(HPC)의 성능이 높아지면서 반도체 기판 역시 대면적·고다층 제품으로 고도화되고 있고, 삼성전기는 2028년을 목표로 생산 기반을 선제적으로 확충하기로 했다.
국내에서는 세종사업장을 고부가·고난도 FC-BGA의 핵심 생산거점으로 키우고, 해외에서는 베트남 생산법인의 패키지기판 설비를 확대하는 방식이다. AI 서버용 반도체 기판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는 가운데 국내외 생산축을 동시에 확장한다는 점에서 삼성전기의 중장기 사업 방향을 보여주는 투자로 평가된다.
세종 4조2700억원…삼성전기 단일 제품 역대 최대 투자
삼성전기는 9월 28일 세종사업장 패키지기판 생산시설 증설에 4조2700억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투자 기간은 이날부터 2028년 5월 31일까지다. 신규 생산라인은 설비 구축과 준비 과정을 거쳐 2028년 9월부터 양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4조2700억원은 삼성전기가 단일 제품에 집행하는 투자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2025년 말 연결 기준 삼성전기의 자기자본 9조7973억원과 비교하면 약 43.6%에 해당한다. 단순한 기존 설비 보완 수준이 아니라 향후 AI 서버용 패키지기판 사업의 생산 기반을 본격적으로 확대하는 대규모 자본투자라는 의미가 있다.
세종사업장은 앞으로 고부가·고난도 FC-BGA 제품의 핵심 양산기지 역할을 맡게 된다. 삼성전기는 AI 서버뿐 아니라 고성능컴퓨팅 시장에서 요구되는 고사양 반도체 기판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세종 생산능력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이번 투자는 삼성전기가 앞서 밝힌 세종사업장 중장기 투자 방향과도 연결된다. 삼성전기는 지난 7월 세종사업장을 AI 서버용 패키지기판 핵심 생산거점으로 육성하기 위해 2040년까지 약 8조원을 투자하는 구상을 제시했다. 이번에 확정된 4조2700억원 규모의 증설은 해당 생산거점 확대 계획을 구체적인 설비투자로 옮기는 단계다.
신규 생산라인의 양산 시점이 2028년 9월로 예정돼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반도체 패키지기판은 대규모 생산시설을 확보한 뒤 곧바로 고성능 제품을 안정적으로 양산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공장과 장비 구축에 이어 공정 안정화와 고객 요구 수준에 맞춘 생산체계 확보가 필요하기 때문에 향후 수요를 예상한 선행 투자가 요구된다.
베트남에도 2조5100억원…국내외 생산기반 함께 확대
삼성전기는 세종사업장과 동시에 베트남 생산기반도 확충한다. 삼성전기 베트남 생산법인은 같은 날 패키지기판 공장 증설을 위해 2조5100억원 규모의 설비투자를 결정했다.
베트남 투자까지 합치면 이번에 확정된 국내외 패키지기판 투자액은 총 6조7800억원이다. 세종에만 생산능력을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해외 생산법인까지 동시에 확대해 글로벌 패키지기판 공급능력을 끌어올리는 구조다.
베트남 생산법인의 투자액은 2025년 말 기준 해당 법인 자산총액 2조4278억원보다 큰 규모다. 베트남법인의 기존 자산 규모와 비교해도 상당한 수준의 설비 확장이 이뤄지는 셈이다. 공시된 취득 예정일은 2028년 4월 30일이다.
다만 세종과 베트남 투자의 세부적인 역할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세종사업장은 AI 서버용 고부가 FC-BGA 생산능력 확대가 명확하게 제시된 반면 베트남 투자 공시에는 구체적인 패키지기판 제품군이나 고객사가 공개되지 않았다. 따라서 베트남 생산시설에서 어떤 제품을 어느 정도 생산하게 될지는 향후 추가로 확인해야 할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삼성전기는 국내에서는 고성능 FC-BGA 생산기술과 고부가 제품 중심의 핵심 거점을 강화하고, 베트남에서는 패키지기판 생산시설 자체를 크게 확충하는 방식으로 국내외 생산체계를 동시에 넓히게 된다.
FC-BGA가 AI 서버에서 중요한 이유
이번 투자의 핵심 제품인 FC-BGA는 고성능 반도체 칩과 메인보드를 연결하는 패키지기판이다. AI 가속기와 GPU, CPU 등 연산 성능이 높은 반도체에서 발생하는 전기신호와 전력을 안정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고성능 서버의 핵심 부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AI 반도체가 고성능화할수록 패키지기판에 요구되는 기술 수준도 함께 높아진다. 더 많은 신호와 전력을 안정적으로 처리해야 하고 반도체 자체의 크기와 구조도 복잡해지면서 기판 역시 대면적·고다층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일반적인 제품보다 제조 난도가 높아 고성능 FC-BGA를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과 생산능력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삼성전기가 수조원 규모의 설비투자를 결정한 배경에도 이런 시장 변화가 있다. AI 데이터센터 구축이 확대되면서 고성능 서버용 반도체 수요가 늘고 있고, 이에 따라 해당 반도체를 탑재하기 위한 고사양 패키지기판 수요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
장덕현 삼성전기 사장은 올해 3월 주주총회에서 서버·데이터센터용 FC-BGA 수요가 회사 생산능력보다 50% 이상 많다고 밝힌 바 있다. 생산능력 자체가 향후 사업 확대의 제약 요인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신규 생산라인을 미리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진 셈이다.
삼성전기는 글로벌 빅테크 고객과의 중장기 협력을 기반으로 세종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고객사가 신규 설비투자 비용 일부를 지원하고 중장기 물량을 확보하는 형태가 포함돼 있어 대규모 증설에 따른 부담을 줄이면서 향후 생산라인의 가동 물량을 확보하는 구조다.
2028년 AI 기판 생산 확대…실적 성장축으로 부상
삼성전기의 대규모 FC-BGA 투자는 최근 실적 기대와도 연결돼 있다. AI 서버와 데이터센터 시장 확대에 따라 고부가 패키지기판뿐 아니라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등 삼성전기의 주요 AI 서버용 부품 수요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증권가에서는 삼성전기의 올해 3분기 영업이익 전망치를 기존 6000억원 수준에서 최근 6500억~6600억원 수준까지 높여 잡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원·달러 환율 하락이라는 부담에도 AI 서버용 고부가 부품의 판매 확대와 제품 구성 개선이 실적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FC-BGA 생산능력 확대는 단기 실적보다 2028년 이후 사업 구조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세종 신규 라인의 양산 목표가 2028년 9월로 설정돼 있기 때문에 당장 생산량이 증가하는 투자가 아니라 앞으로 수년간 이어질 AI 인프라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중장기 생산능력 확보다.
글로벌 기판업체들의 투자 확대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 이비덴은 AI·고성능 서버용 반도체 기판 생산능력 확대를 추진하고 있으며 대만 유니마이크론 역시 고성능 기판 설비투자를 늘리고 있다. 국내에서도 FC-BGA 사업 확대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AI 반도체의 성장에 대응하기 위한 패키지기판 업체들의 생산능력 경쟁이 본격화되는 모습이다.
장덕현 사장은 AI와 고성능컴퓨팅 시장 성장으로 고부가 반도체 기판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며 차별화된 기판 기술과 안정적인 공급능력을 바탕으로 AI·서버·전장 등 성장 시장에서 FC-BGA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앞으로 주목할 부분은 세종과 베트남 증설이 예정된 일정에 맞춰 진행되는지, 2028년 신규 생산라인 가동 시점까지 AI 서버용 고사양 기판 수요가 어떤 속도로 확대되는지다. 삼성전기가 6조7800억원이라는 대규모 투자를 통해 생산능력을 먼저 확보하기로 한 만큼 이번 증설은 향후 AI 서버용 반도체 기판 시장에서 삼성전기의 공급 규모와 사업 경쟁력을 결정할 주요 변수가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