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치위스키 120억병 규모 재고…‘위스키 호수’ 우려 커진 이유



한때 세계적인 위스키 열풍에 맞춰 생산시설을 늘렸던 스코틀랜드 위스키 업계가 이번에는 거대한 재고 부담과 마주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숙성 창고에 보관 중인 위스키는 약 14억ℓ로 추산되며, 현재 소비 속도를 기준으로 하면 약 3년치에 해당한다. 스카치위스키협회(SWA)가 집계하는 숙성 캐스크는 약 2200만 개로, 이를 70cl 병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120억병 규모다.

다만 120억병 전체를 당장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완제품 재고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스카치위스키는 법적으로 스코틀랜드에서 오크통에 최소 3년 이상 숙성해야 하며, 고연산 제품은 그보다 훨씬 오랫동안 창고에 보관된다. 문제는 장기간 숙성이 필요한 산업 특성상 수요가 예상보다 빠르게 둔화해도 이미 만들어 놓은 원액을 단기간에 줄일 수 없다는 데 있다.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스코틀랜드 위스키 산업이 2010년대 생산 확대 이후 세계 소비 둔화와 수출 부진이 겹치면서 1980년대 이후 가장 심각한 조정 국면 가운데 하나를 맞고 있다고 전했다. 일부 증류소는 생산일수를 줄이거나 증류 자체를 일시 중단하면서 추가 재고 증가를 막는 데 나섰다.

왜 120억병 규모의 위스키가 창고에 쌓였나

현재의 재고 문제는 단기간에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다. 위스키 산업은 오늘 생산한 술을 곧바로 판매할 수 없는 구조다. 최소 3년이라는 법정 숙성 기간 때문에 생산업체는 몇 년 뒤의 시장 수요를 예상해 미리 원액을 만들어야 한다.

2010년대 세계적으로 스카치위스키 수요가 확대되자 주요 업체들은 앞으로도 판매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증류시설을 확대했다. 새로운 증류소가 문을 열었고 기존 업체 역시 생산능력을 키우면서 숙성 창고에 들어가는 원액도 증가했다.

그러나 생산 당시의 전망과 현재 소비 환경 사이에 차이가 생겼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시장이 크게 흔들렸고, 이후 높은 물가와 생활비 부담,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이어졌다. 프리미엄 주류에 지출할 수 있는 소비자의 여력이 줄어든 데다 일부 시장에서는 젊은 소비층을 중심으로 술을 적게 마시는 흐름도 나타났다.

위스키처럼 생산과 판매 사이에 수년의 시간차가 존재하는 산업에서는 이러한 수요 변화가 즉각 생산량에 반영되지 않는다. 몇 년 전에 만들어진 원액이 계속 숙성 단계에 진입하기 때문이다. 현재 약 14억ℓ의 위스키가 숙성 중이라는 수치는 과거의 수요 전망과 현재 시장 상황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커졌는지를 보여준다.

SWA에 따르면 현재 스코틀랜드 전역의 창고에서 숙성되고 있는 캐스크는 약 2200만 개다. 협회는 이를 70cl 병으로 환산하면 약 120억병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2026년 5월 기준 스코틀랜드에서 가동 중인 스카치위스키 증류소는 154곳이다.

2025년 수출 53억파운드…판매량과 싱글몰트 모두 감소

재고 부담을 키우는 또 다른 요인은 수출 둔화다. 스카치위스키는 생산량 상당 부분을 해외에서 판매하기 때문에 주요 수출시장의 소비 변화가 증류소 가동률과 향후 생산계획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SWA의 2025년 확정 수출 통계에 따르면 스카치위스키의 세계 수출액은 약 53억파운드로 전년보다 1.8% 감소했다. 수출량은 70cl 병 환산 약 13억4000만병으로 4.3% 줄었다. 전 세계로 초당 약 43병이 수출된 셈이지만 전년의 44병보다 감소했다.

특히 고가 제품군의 약세가 두드러졌다. 2025년 싱글몰트 스카치위스키 수출액은 약 16억파운드로 전년보다 6% 감소했다. 생활비 부담과 소비 둔화가 이어지면서 상대적으로 비싼 제품군에서 수요 약화가 나타난 것이다.

최대 수출시장 중 하나인 미국 역시 부담 요인이 됐다. 미국으로의 2025년 전체 수출액은 9억3300만파운드로 전년보다 4% 감소했고, 전체 연간 수출 물량은 약 1억2000만병으로 9.2% 줄었다. 특히 2025년 4월 미국의 10% 관세가 도입된 이후인 5월부터 12월까지 수출 물량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15% 감소했다.

다만 미국 시장의 관세 환경에는 이후 변화가 생겼다. 2026년에는 스카치위스키에 대한 미국의 관세가 철폐돼 다시 무관세 교역이 복원됐다. 따라서 2025년에 나타난 미국 시장의 급격한 감소세가 장기간 같은 수준으로 이어질지는 추가 수출 통계를 확인해야 한다.

생산 줄여도 재고는 바로 사라지지 않는다

수요 약화를 확인한 증류업체들은 이미 생산량 조절에 나서고 있다. FT에 따르면 일부 업체들은 일주일 내내 가동하던 증류시설의 운영일수를 줄였으며, 일부 독립 증류소는 생산을 한동안 중단하고 기존 재고 관리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 제조업처럼 생산량을 줄였다고 해서 재고 문제가 빠르게 해결되는 구조는 아니다. 지금 판매되는 10년산이나 12년산 위스키는 말 그대로 10년 또는 12년 전에 생산된 원액을 기반으로 한다. 반대로 현재 증류소가 생산량을 줄이면 그 영향은 몇 년 뒤 판매할 수 있는 숙성 원액의 부족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위스키 업체들은 현재 판매 상황뿐 아니라 앞으로 수년에서 수십 년 뒤의 수요까지 고려해야 한다. 지나치게 많이 만들면 창고와 금융비용 부담이 커지고, 반대로 지나치게 생산을 줄이면 수요가 회복됐을 때 필요한 연산의 원액을 확보하지 못할 수 있다.

바로 이 구조 때문에 현재 상황은 1980년대 스코틀랜드 위스키 산업이 겪었던 이른바 ‘위스키 호수(whisky loch)’와 비교되고 있다. 당시에도 1960~1970년대 수요 증가를 기대해 생산량을 크게 늘렸지만 판매가 예상에 미치지 못하면서 대규모 재고가 발생했다.

업계는 1981년을 전후해 생산량을 대폭 줄였고 1980년대에는 여러 증류소가 문을 닫았다. 당시 생산된 과잉 원액을 시장이 흡수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현재와 산업 규모와 수출시장의 다변화 정도는 다르지만, 미래 수요를 낙관해 생산을 늘린 뒤 소비가 둔화했다는 점에서 과거 사례가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인도 시장은 돌파구 될까…관세 인하 효과 주목

모든 시장이 감소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스카치위스키 업계가 특히 기대하는 시장은 인도다. 2025년 인도로 수출된 스카치위스키는 70cl 환산 약 2억2000만병으로 전년보다 15% 증가했다. 물량 기준으로 세계 최대 스카치위스키 수출시장이다.

수출액 역시 약 2억8600만파운드로 15% 늘어 미국과 프랑스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시장으로 올라섰다. 이는 성숙시장인 미국과 유럽의 수요 둔화를 신흥시장 성장으로 보완하려는 업계에 중요한 변화다.

여기에 영국과 인도의 자유무역협정이 2026년 7월 15일 발효되면서 스카치위스키 업계가 인도에서 부담하던 관세도 낮아지게 됐다. SWA는 인도 시장의 성장과 무역장벽 완화가 장기적으로 스카치위스키 수요 확대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다만 인도 시장의 성장만으로 단기간에 현재의 대규모 재고를 해소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SWA 역시 인도의 성장 잠재력은 장기적인 기회이지만 현재 세계 여러 시장에서 나타나는 수요 둔화를 즉시 상쇄하는 해결책은 아니라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결국 스코틀랜드 위스키 산업의 과제는 단순히 창고에 쌓인 120억병 상당의 원액을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실제 판매 가능한 연산별 재고를 관리하면서 생산량을 조절하고, 미국과 유럽 같은 기존 핵심 시장을 회복하는 동시에 인도·중국 등 새로운 성장시장을 확대해야 한다.

현재 숙성 중인 약 14억ℓ의 위스키 가운데 상당량은 아직 법정 숙성기간이나 각 브랜드가 정한 숙성기간을 채우지 않았다. 따라서 ‘120억병 재고’라는 숫자가 곧바로 팔리지 않은 완제품 120억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 소비 속도의 약 3년치에 해당하는 원액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은 생산 확대기에 형성된 공급과 최근의 소비 둔화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스카치위스키 업계가 생산량을 줄이면서 과잉 재고를 관리하고 있는 가운데 향후 핵심 변수는 미국 시장 회복, 영국·인도 자유무역협정 효과, 프리미엄 싱글몰트 소비의 회복 여부가 될 전망이다. 1980년대 ‘위스키 호수’와 같은 장기 침체로 이어질지, 새로운 수출시장 확대를 통해 재고 조정에 성공할지는 앞으로의 판매량과 생산 감소 속도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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