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렸던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이 52년 만에 새로운 영화의 소재로 등장했다. 허진호 감독의 신작 ‘암살자(들)’이 9월 23일 개봉하면서 실제 역사적 사건과 영화적 상상력을 결합한 이야기를 선보인다.
영화는 당시 사건을 둘러싼 의문에서 출발하지만 특정한 배후를 역사적 사실로 확정하는 방식은 택하지 않았다. 대신 사건 현장에 있었던 형사와 진실을 취재하는 기자들을 중심으로 수사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197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그린다.
유해진과 박해일, 이민호가 주요 인물을 연기하며 박정민은 실제 저격범 문세광을 모티브로 한 인물로 등장한다. ‘서울의 봄’과 ‘남산의 부장들’을 제작한 하이브미디어코프가 제작을 맡았다.
허진호 감독이 10년 넘게 준비한 작품이라는 점도 관심을 끈다. 감독은 사건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는 동시에 당시 사회를 살아갔던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행동하고 선택했는지를 영화의 중요한 이야기로 구성했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영화는 어디서 출발했나
‘암살자(들)’의 출발점은 1974년 8월 15일 서울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발생한 광복절 경축식 저격 사건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발표하던 행사장에서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권총을 발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총격을 피했지만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사건 직후 정부는 수사본부를 구성해 수사를 진행했다. 당시 수사당국은 문세광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를 통해 북한 공작원의 지령을 받고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문세광은 재판을 거쳐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974년 12월 형이 집행됐다. 경호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는 경찰 관계자들이 파면되는 등 후속 조치도 이뤄졌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수사 결과와 역사적 기록에 해당한다. 다만 사건의 구체적인 배후와 일부 정황을 둘러싸고 이후 여러 의문이 제기됐으며, 영화는 바로 이러한 논쟁의 존재를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활용한다.
여기서 구분해야 할 부분은 실제 사건의 기록과 영화가 만들어낸 허구적 설정이다. 영화 속 형사와 기자들의 추적 과정은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구성된 창작 이야기이며, 작품에 등장하는 추론이나 가설이 실제 사건의 진상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허진호 감독 역시 이번 작품에서 하나의 결론을 제시하기보다 당시 사건을 다시 살펴보게 만드는 질문을 던지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영화 제목에 사용된 괄호도 이러한 연출 의도와 연결된다. ‘암살자’라는 단어 뒤에 복수형을 나타내는 ‘들’을 괄호로 배치하면서 사건을 바라보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유해진·박해일·이민호, 서로 다른 위치에서 사건 추적
영화의 중심에는 저격 사건을 직접 목격한 형사와 사건을 취재하는 언론인들이 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사건을 접하지만 공식적인 수사 결과에 의문을 품고 진실을 확인하려 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유해진이 연기하는 철구는 광복절 경축식 현장의 경호를 담당했던 경찰이다. 사건 이후 경호 책임을 이유로 동료들이 불이익을 받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사건의 실체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철구의 이야기는 단순한 범인 추적에 머물지 않는다. 자신이 속한 조직의 수사 결과에 의문을 품게 된 경찰이 동료에 대한 책임감과 진실을 확인하려는 의지 사이에서 행동하는 과정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박해일은 신문사 사회부장 재환을 연기한다. 재환은 사건을 취재하면서 수사당국의 발표와 현장에서 확인되는 정황을 비교하고,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취재를 이어가는 인물이다.
이민호가 맡은 영일은 사건 현장을 목격한 신입 기자다. 경험이 풍부한 사회부장 재환과 신입 기자 영일이 함께 취재하는 과정은 사건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제공한다.
영화는 경찰의 수사와 언론의 취재를 나란히 전개하면서 같은 사건에 접근하는 방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형사 철구가 현장과 조직 내부의 상황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기자들은 취재와 보도를 통해 의문을 확인하려 한다.
실제 저격범 문세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극중 인물 문태광은 박정민이 연기한다. 문태광은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지만 영화는 그의 행동을 둘러싼 모든 의문에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인물 설정은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는 동시에 관객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로 활용된다.
허진호 감독이 10년 넘게 준비한 이유…1970년대 언론 현실도 재현
‘암살자(들)’은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보통의 가족’ 등을 연출한 허진호 감독의 신작이다. 인물 사이의 감정과 관계를 섬세하게 다뤄온 감독이 현대사의 저격 사건을 소재로 한 추적극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기존 작품들과 차이가 있다.
허 감독은 9월 10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자신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당시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당시 가족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후 약 10년 전 해당 사건을 다룬 시나리오를 접하면서 영화 제작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감독은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관련 다큐멘터리와 책, 논문, 해외 자료 등을 살펴봤다고 밝혔다.
다만 역사적 사건을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어떤 관점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오랜 고민의 대상이었다. 허 감독은 확인할 수 있는 사실과 영화적 상상력을 구분하면서 특정한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발전시켰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인물들이 기자들이다. 감독은 초기 시나리오에 없었던 언론인 캐릭터를 추가해 사건의 진상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의 행동을 이야기의 또 다른 중심에 배치했다.
영화에는 1970년대 언론 검열과 정부 비판 보도가 제한되던 당시의 상황도 등장한다. 신문사에 상주하는 검열원이 기자들의 보도에 개입하는 장면을 통해 언론이 처했던 현실을 재현한다.
이러한 설정은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이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과도 연결된다. 당시 언론인들은 외부 압력과 검열에 맞서 자유로운 보도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다만 영화에 등장하는 가상의 신문사와 기자들의 구체적인 행동은 창작된 이야기다. 실제 자유언론실천선언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영화 속 취재 활동을 동일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허 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사건 자체뿐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진실을 확인하고 알리려 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함께 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대규모 특별출연과 시대 재현…추석 극장가에서 공개
이번 영화는 주요 출연진 외에도 다수의 배우가 특별출연한다. 정우성, 박해준, 유연석, 오정세, 신현빈, 류경수, 임원희, 오달수, 엄태웅, 배성우, 박성훈 등이 작품에 참여했다.
특별출연 배우가 10명을 넘는 만큼 익숙한 배우들의 등장이 관객의 시선을 끌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출연 방식이 이야기의 긴장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관객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허 감독은 특별출연 배우들의 존재감이 작품에 지나치게 부각될 가능성을 고민했다고 밝혔다. 동시에 각각의 인물이 짧은 등장만으로도 의미를 전달할 수 있도록 배우들을 배치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시대적 배경을 구현하기 위한 촬영 작업도 진행됐다. 제작진은 오래된 건축물과 거리가 남아 있는 대전의 재개발 예정 지역 등을 활용해 1970년대의 공간을 재현했다.
촬영은 ‘서울의 봄’과 ‘파묘’ 등에 참여한 이모개 촬영감독이 맡았다. 영화는 당시의 건축물과 신문사, 경축식 행사장 등을 배경으로 사건의 진행 과정과 인물들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해외 영화제에서도 작품이 소개됐다. ‘암살자(들)’은 제51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공식 초청됐다. 허진호 감독에게는 ‘위험한 관계’와 ‘보통의 가족’에 이어 세 번째 토론토국제영화제 초청작이다.
국내 개봉일은 2026년 9월 23일이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개봉하는 작품으로, 실제 역사적 사건에 기반한 시대극과 미스터리 추적극의 요소를 결합했다.
영화를 관람할 때 중요한 부분은 역사적 기록과 창작된 이야기를 구분하는 것이다. 실제 사건의 발생과 당시 수사 결과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영화 속 형사와 기자들의 추적, 인물 사이의 관계와 일부 사건 전개에는 창작이 포함돼 있다.
허진호 감독은 사건의 배후를 단정하는 대신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진실을 찾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주목했다. ‘암살자(들)’은 이러한 접근을 통해 1974년의 사건을 오늘날 관객에게 다시 소개한다.
